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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출생하였다. 1882년(고종 19) 동학에 입교하여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고, 최시형이 처형된 후 제3대 교조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였으나, 공주(公州)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평안도 지역으로 은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에 힘썼으며,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동학경전인 동경대전의 '도즉천도(道則天道)'에서 따온 개칭은 당시 친일운동에 앞장선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파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여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운동방향을 비폭력주의로 국한시켰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0년 형 집행정지로 출감하였으나 62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